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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FFs



편집국장 이종권

조계종 국제포교사 3기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
조계사 불교대학 졸업
캔사스 주립대학 대학원 (The University of Kansas at Lawrence) 미국학 (석사)

뉴욕불교 편집장 (2003-2004)
청소년 자원봉사단 Lotus Helpers 단장 (2005-2010)
Dharma BOOM of America, Inc. 대표 (2008 ~)
조계종 해외사찰 현황조사 현지조사원 (2009)
미주불교신문 편집국장 (2011 ~)

저서 및 역서: 논문:
Minimum Dharma and Maximum Sangha: Americanization of Buddhism
with reference to three Buddhist Groups in Lawrence, Kansas (2002)
해외포교의 이론과 실제 1, 2권 (2010)
선방일기 영문판 Diary of a Korean Zen Monk (2010)

수상경력: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 (해외포교부문) (2010)

편집국장 인사말

10년전 뉴욕불교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이 잡지는 당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2004년도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뉴욕불교 편집장이었던 저는 언론계를 떠나 있으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숙고하며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지속될 수 있는 문서포교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사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다행히 이 같은 노력에 감응하셔서 부처님은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2011년 5월 미주불교신문사 이사장이신 경암 큰스님이 저에게 미주불교신문의 편집장이라는 소임을 부여해주셨고 또다시 일 년 반의 준비를 통해 인터넷 미주불교신문으로 다시 인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뉴욕불교 시절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흘렀고 제가 봉사하는 매체의 이름과 포맷은 바뀌었지만 뉴욕불교의 편집장으로 불교 언론계에 데뷔할 때와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미주불교신문을 위해 힘찬 출발을 하는 이 시점에 독자 여러분께 인사 올리며 당시에 작성했던 인사 글을 다시 올려드립니다. 10년을 한결같이 정진하였습니다. 10년 전의 이 글이 바로 오늘의 저입니다. 뉴욕불교 편집장이 미주불교신문사의 편집장입니다. 많이 지켜봐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뉴욕불교 』2003년 3-4월호





웹매스터 김기현

경기불교대학 제1회 졸업 (1999.2.6.)
조계종 포교사 4기 품수 (1999.3.7.)
조계종 국제포교사 4기 품수 (1999.9.18.)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인하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졸업 (공학석사)

하이텔불교동호회 제4대 운영진 (감사) & 회지편집인 (1995~1996)
수원포교당거사회 홈페이지(www.sunnamja.or.kr) 제작 관리 (2000.1.~2003)
감로향사 홈페이지 (www.bauddha.org) 제작 관리 (2000.9.~2010)
국제포교사회 홈페이지(www.idia.or.kr) 제작 관리 (2000.9.~2013.3)
경기불교문화원 홈페이지 (www.paragate.org) 제작 관리중 (2003.~)
세인트루이스 불국사 홈페이지 (www.buddhanara.net) 제작 관리중 (2011~)
필라델피아 화엄사 홈페이지 (www.philahwaumsa.us) 제작 관리중 (2012~)
미주불교신문 홈페이지 (www.koreanbuddhism.us) 제작 관리중 (2012~)


수상경력
2002 포교사단장 표창 (사찰안내)
2003 포교사단장 표창 (사이버홍보)
2004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홍보)


웹매스터 인사말

[나의 신행수기] 조계종 포교사 / 국제포교사 김기현

사이버 포교는 나의 화두

어렸을 적에는 할머님께서 초파일이면 뒷골 절에 다니시던 일과 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님께서 이른 새벽이면 천수경을 독송하시던 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이 불교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지체장애인에게 주위의 전도사로부터 교회에 나가면 좋을 거라는 권유는 자주 들었던 반면에, 불법을 전해주었던 사람은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인연이 안 되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불교를 동경하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셨던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의 모습은 어려서 그림처럼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지만, 앞날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지라, 아직 자신의 뜻을 표현 할 수 없었던 3살 때에 나의 이런 행복한 생활은 정반대로 뒤바뀌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지금 같으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척추결핵을 앓게 되었지만, 아픈 사실조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린 나이로 인하여 아프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고, 치료를 위해서 만사를 제쳐두고 여러 곳을 전전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던 부모님의 애타는 기대에도 아랑 곳 없이 결국에는 척추가 굽어지는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등·하교 길에 동네 개구쟁이들의 호기심과 놀림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스스로 공부하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수석졸업과 중학교 수석입학, 고등학교 수석졸업을 했지만, 장애인이었기에 내가 원하는 대학 진학을 못하는 좌절을 맞보게 되었다. 아버님은 내게 약국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내라고 약대를 진학하길 원하셨지만, 전자공학과를 고집한 내 뜻에 따라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지원이 가능한지를 문의하는 서신을 학과장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결론은 ‘지체 장애인의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정중한 회신이었다.

30년이 지난 요즈음에야 세상이 많이 변하였지만, 그 시절 학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장애인에게 조차도 그때 그 시절 그들의 한심한 생각은 한 장애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서울대 진학을 포기하고 입학이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은 인하공대 전자공학과로 진학은 하였지만 그때의 좌절과 분노는 불법의 바다에서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지은 것임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 후유증이 상당한 시간 지속되었다.

처음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는 법회에 참석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74년으로 기억하며, 그 당시에 한창 인기 있던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 의 저자이면서 유명한 조계종 포교사이셨던 정다운 스님을 초청법사로 모신 대학생불교학생회의 초청법회였다. 어느 초파일날 우이동 대도선사의 연등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것을 보다가 귀가할 시내버스 시간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서대문구 북아현동 집까지 머나먼 길을 밤새워 걸어갔다. 내 자신이 차츰 불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어느 날 수원 시내를 운행하는 봉녕사 승가대학 버스에 붙어있는 기초교리과정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플래카드를 보고서 직접 봉녕사를 처음 찾아갔다. 수강신청서를 2장 가져와서 아내와 함께 수강신청을 하고서 기초교리 과정 2기를 수료하면서 묘엄 학장스님으로부터 대운이라는 법명으로 수계를 받고 드디어 불자가 되었다. 딸과 아내와 함께 늦었지만 삼십대 후반에서야 드디어 불법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지만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다. 기초교리에서 처음 들었던 법문은 반야심경의 ‘전도망상’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을 거꾸로 하고 있기에 그것을 반대로만 한다면 그게 바로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기억된다.

수계 후에는 봉녕사거사림회 회원으로 매주 거사림회 법회에 아내와 함께 참가하는 것으로 신행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끔씩 유명 사찰을 찾는 성지순례를 가족들과 함께 다녀오거나 초청법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관음예찬 참선 등을 통해서 불교의 무한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전 PC통신 하이텔불교동호회 온라인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법우들과 만나는 한편, 수원포교당거사회에서도 활동하면서 초등학생인 딸은 수원포교당 가릉빈가 어린이합창단원으로 ‘불밭에 피는 꽃’ 공연에 참가하는 등 가족 전체가 함께 불법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행복한 순간도 잠시 결혼 13년여 만에 그동안 함께 봉녕사에서 기초교리를 수강하고 수계를 받으며 감동에 벅찬 눈물을 흘렀던 아내는 초등학교때부터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람을 따라 흰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던 1997년 겨울 초등학생 딸과 나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인과의 법칙은 한 치의 어김도 없다더니 그것은 바로 내가 지었던 업에 대한 과보이리라.

假令經百劫 설사 백겁이 지나더라도
所作業不亡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아서
因緣會遇時 인연을 만날때는
果報還自受 그 과보를 스스로 받는다

수원포교당 부설 경기불교대학의 설립과 함께 제1회로 졸업 함과 동시에 조계종포교사 고시에 합격하여 1999년 봄에 품수를 받게 되었으며, 이어서 조계종 국제포교사 연수생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6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1999년 가을에는 국제포교사 품수도 받고 싱가포르 해외연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또, 남방불교의 수행전통을 간직한 버마사찰, 스리랑카 사찰, 규모가 엄청나게 큰 중국사찰 광명산 보각선사 등을 보면서 불교의 다양함과 위대한 정신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포교사단의 출범과 함께 팀별로 교육과 실습을 통해서 포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사찰안내의 일원으로 여주 신륵사 사찰안내를 하면서, 가상의 사이버공간에서 포교사로서의 사명을 지켜가게 되었다. 도반들과의 중국 4대불교성지중 하나인 보현보살의 아미산 성지순례에 이어 부처님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통해서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확인하면서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 조카의 졸업식 참석후 미국내 한국사찰방문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표 구입을 마치고 출국 날을 기다리던 2004년 연등축제를 앞두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서 초파일을 보낸 후 한 달 만에 퇴원하고 재입원을 반복하다 안정을 되찾아 이제는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외래진료를 받으며 집에서 투약과 산소요법을 시행중이지만, 그래도 사이버포교는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그동안 포교사 도반들과 함께 하였던 신륵사 사찰안내, 2002년 월드컵 기간 용주사 템플스테이 외국어자원봉사와 서울연등축제에서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앞으로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계속할 것을 다짐한다.


[사진] 연수를 담당하셨던 아디차스님과 강화 전등사에서

<주> 이 글은 2001년 불교신문에 기고했던 글에
그 후 이야기를 추가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 이종권 편집국장(왼쪽)과 김기현 웹매스터 @2008.09.05. KINTEX 불교박람회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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